그림책 디자인과 시각 스토리텔링
그림책은 글 없이도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수지 작가는 pxd talks 강연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그림책들을 통해 시각 스토리텔링의 원리를 풀어냈다. 핵심은 "구멍이 많은 이야기"—독자의 상상이 개입할 여백을 남기는 것이다. 글 한 줄 없이도 연필선과 스케치의 연속만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가브리엘 뱅상의 《떠돌이 개》), 시각적으로 명쾌하고 논리적인 구성이 머리를 치는 그림책을 만든다는 것(엔조마리의 《SEE-SAW》), 그리고 글이 없어야 더 잘 표현되는 장면이 있다는 것(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이 세 가지 통찰이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철학의 토대다.
이수지 작가가 추구한 그림책의 키워드는 글 없는 그림책, 가슴을 치는 감정, 단순한 선, 아이들의 몸짓, 시간의 논리적 해결, 말없이 보여주기, 놀이다. 이 키워드들은 《파도야 놀자》에서 구체화되었다—아이가 노는 한 순간을 여러 컷으로 늘여 동작 하나하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을 담는 방식으로. 사실 아이들은 3분 이상 집중하기 어렵지만, 그 짧은 시간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면 좋은 그림책이 된다는 것이 이수지 작가의 기준이다.
형식 실험도 이수지 작가의 중요한 탐구 주제다. 《거울속으로》에서는 인쇄물의 접힘 경계선을 역이용해 재미 요소로 만들었고, 《동물원》에서는 아이의 시점과 부모의 시점을 다른 화면으로 분리해 표현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책을 덮는 손이 보이는 메타적 구조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탐구했다. 《그림자놀이》는 책이 접힌 경계선을 기준으로 위는 현실, 아래는 그림자 속 상상의 공간으로 나눈 Negative와 Positive의 공존을 다뤘다. 이러한 실험들은 그림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물성—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접힘,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림책은 "어린이만 보는 책이 아닌 어린이부터 보는 책"이다. 어린이부터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공유가 담긴 책이 좋은 그림책이다. 이 관점은 UX 디자인과도 닿아 있다—좋은 인터페이스도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감정적 공명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이수지 작가는 이 강연보다 3년 앞선 2012년 pxd talks 12회(2012-11-16)에서도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주제로 pxd를 방문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는 경계 3부작—《파도야 놀자》(WAVE), 《거울속으로》(MIRROR), 《그림자 놀이》(SHADOW)—을 중심으로, 책의 펼친 면(가운데 접히는 부분)이라는 매체 고유의 물성을 경계로 삼아 현실과 상상을 나누는 작업 방식을 설명했다. 같은 판형으로 제작된 세 작품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경계를 다룬다는 점, 그리고 《그림자 놀이》는 보는 방향(가로/세로/90도)에 따라 그림자의 인상이 달라지도록 설계됐다는 점이 소개됐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이고 매체(예: iPad)는 그다음"이라는 원칙, 그리고 당시 출시된 그림책 앱 대부분이 종이 콘텐츠를 그대로 '번역'하는 데 그쳐 인터랙션 효과가 오히려 책 특유의 몰입과 소통을 방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매체는 그 매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할 때 가장 재미있다는 관점이다. 강연 말미에는 작가가 직접 수집한 세계 각지의 실험적 그림책(가브리엘 뱅상, 브루노 무나리, 에르베 튈레 등)을 소개하며, 촉각·타공·색채 등 인쇄와 제본 기법 자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사례들을 보여줬다. 2015년 강연이 "구멍이 많은 이야기"라는 서사적 원리에 초점을 맞췄다면, 2012년 강연은 책이라는 매체의 물리적 구조(펼침·접힘·방향)를 표현 도구로 전환하는 형식 실험에 더 무게를 뒀다는 점에서 상호 보완적이다.
핵심 내용
- 글 없는 그림책: 이미지의 연속만으로 감정 전달 가능, 독자의 상상이 개입할 여백이 중요
- 구멍이 많은 이야기 — 완결된 서술보다 여백이 있는 이야기가 더 강한 인상을 남김
- 단순한 선과 스케치가 오히려 더 풍부한 감정 표현을 가능하게 함
- 형식 실험: 페이지의 접힘, 여백, 시점 분리 등 매체의 물성을 적극 활용
- 그림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공감할 수 있는 감정 공유의 매체
- 아이들과 어른이 같은 장면에서 감동받는 공통성이 그림책의 힘
- 경계 3부작(《파도야 놀자》·《거울속으로》·《그림자 놀이》) — 책의 펼친 면(접힘)을 경계 삼아 현실과 상상을 나눈 연작
- 매체는 그 매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할 때 가장 재미있다 — 종이 콘텐츠를 그대로 옮긴 그림책 앱에 대한 비판
관련 개념
-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 글 없이 이미지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원리
- 내러티브 디자인 — 순서와 흐름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설계
- UX 라이팅 — 글과 이미지의 역할 분담, 말없이 보여주기의 원리
출처
- [pxd talks 60]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이야기' — 2015-07-14, pxd talks
- [2012 pxd talks 12] 현실과 상상의 경계 ::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이야기 — 2012-11-16, 김 선오